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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고등학교 때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 못 했다. 시험 기간에 의무감으로 하는 정도였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명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비판적이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반 60명 중에 10등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수능 성적을 받고 갈 수 있을만한 대학에 지원했고 전공은 별 고민 없이 결정했다.

본의 아닌 진로는 결국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할 때 불어불문학과가 프랑스어를 배운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언어는 하나라도 제대로 배워두면 유용할 거라는 기대만 있었다. 참 단순했다.

1~2학년 때는 어학 수업이 많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학 수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언어 하나라도 제대로’라는 빈약했던 의지는 사그러드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3학년으로 진학하자 문학 수업이 많아졌고 4학년은 거의 문학 수업밖에 없었다. 사실 불어불문학과는 일반적으로 어학보다는 문학 비중이 높다.

잘하지도 못 했던 어학의 비중이 줄어들고 문학을 배우면서 전공이 내 밥벌이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접었다.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과학우들이 갖고 있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각자 살길을 모색했고 학과 공부는 점수를 따는 데만 열중했다. 나 역시 관심사를 밖으로 돌렸고 불문 학도로서의 미래가 아닌 다른 미래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잠깐, 문학? 철학?


이제 학과 수업은 진로와 무관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과 수업이 교양이 되고 나니 오히려 흥미가 생겼다.

고등학교 때는 문학을 문학답게 공부했던 적이 없다.
문제를 풀기 위해 답이 정해진 해설이나 달달 외울 뿐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는 법과 즐기는 법을 전혀 몰랐다.

문학이 작가의 철학을 담는 도구라는 점도 대학에 와서야 제대로 이해했다.

그리고 철학은 호기심이 많은 나와 잘 맞았다.

문학으로 철학을 접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소설을 즐기질 못한다. 차라리 난해한 철학서가 낫다. 수업 시간에는 작품을 직접 읽는 것보다 작가의 해설을 읽고 공부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철학과 수업을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철학과가 나한테는 더 잘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인생을 풍요롭게 살기 위한 하드웨어를 갖추지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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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궁금한게 있으면 참지를 못했는데 특히 삶과 죽음에 관해서 더 그랬다. 세상은 누가 만들었고 나는 누구인지,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육체와 영혼은 분리된 것인지와 같은 불가지론에 흥미를 가졌다.

대학에 가기 전에는 인터넷을 기웃거리며 어설픈 누리꾼들의 수준 낮은 글들을 탐닉했다.
당시에는 왜 제대로 철학을 공부할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협소하게나마 철학 다운 철학을 불문학으로 배웠다.
4년을 공부하면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프랑스 문학 사조를 대충 훑는다.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등을 배웠다.
그중에서 단연코 나의 관심을 끈 사조는 ‘실존주의’ 였다.

실존주의 철학은 어렵다. 지식인들조차 해석과 의견이 분분하다. 학사 졸업생이라면 졸업할 때쯤 나름대로의 해석과 정리가 필요하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장 폴 사르트르-

연필은 기록을 위해 만든다. 의자는 좌식 생활을 위해 만든다.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기 전(실존)에 존재의 이유나 가치(본질)가 우선한다.
하지만 연필이나 책상과 다르게 인간은 아무런 이유와 목적 없이 세상에 태어난다. (유신론자의 입장은 다르겠지만) 부모님은 의도하에 나를 만들었지만(실존) 특별한 쓰임(본질)을 위해 만들지는 않았다.

내 존재는?이 세상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동댕이 쳐졌다. 따라서 나의 본질과 삶의 가치는 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세속적인 말로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달콤하기만 하지 않다. 지루함과 고통의 반복이기도 하다(삶의 부조리).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이렇게 힘든 삶을 왜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

어려서부터 자살은 종교나 윤리 규범에 의해 나쁜 것이라고 교육받았다. 하지만 실존주의에 따라 내가 태어난 이유가 없다면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실존주의는 해석하기에 따라 인생에 대해 회의적인 사고관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까뮈는 말한다. 삶은 부조리가 가득하고 허무한 것임을 인정하되 이에 절망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인정하고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삶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주어진 부조리한 삶에 저항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을 내 삶에 반영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실존주의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부분이 있다.
특히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유한한 삶’을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다. 그러고나니 다행히 현재의 삶이 환해졌다.

전공과 삶


교수님들 얼굴이 생각난다. 교수님들의 얼굴은 늘 불편했었던 것 같다.

취업, 취업, 취업만을 강조하는 대학 본부와 취업, 취업, 취업이 중요한 학생들 사이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은 아마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물론 모든 교수님들이 그렇진 않았지만)

전공인 불문학은 아직까지 내 삶에서 전혀 실용적이지 못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본질에 충실한?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불문학을 배워서 삶을 좀 더 진지하고 수준 높게 대하게 됐으니까.

그걸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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