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dalai lama

여행이 건넨 바톤


6개월간의 여행에서 가장 큰 인상을 받은 도시는 인도의 다람살라였다. 티뱃의 망명정부와 달라이라마가 살고 있는 곳이다.
지인을 뵙기 위해 이곳에 방문했다. 화실에서 알게 된 분인데 오랫동안 다람살라에 사셨다. 다람살라는 영적인 기운과 따뜻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달라이라마가 있기 때문에 내 오감이 그리 작동한지도 모르겠다.

지인분은 그림을 그리면서 티뱃불교를 공부하고 계셨다. 덕분에 여행객인 주제에 꽤나 깊이 있게 현지인의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다. 덤으로 티뱃불교에 대한 많은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다람살라의 기운과 달라이라마, 티뱃불교는 호기심 많은 나를 자극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달라이라마의 책을 몇 권 읽었다. 가장 뇌리에 깊이 박힌 내용은 이제부터는 인간이 이타심의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타심. 정글 같은 세상에서 추구하기 힘든 가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나 커다랗게 다가왔다.

 

 

봉사활동 시작


나는 확실히 꽂혔다. 이타적 행동을 실천해보기로 했다.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동네 복지관에서 주말마다 노인분들께 식사 배식을 하고 복지관을 청소하는 봉사활동을 했다. 진심을 담아 열심히 했다.

함께 봉사하시는 분들이 요새 같은 세상에 저런 젊은이도 있다고 참 이뻐해 주셨다. 마음은 감사했지만 이런 식의 보상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보다 깊은 내면의 충족감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학교생활, 봉사활동,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다 보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당시에는 셋 중에 봉사활동이 가장 중요했다.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접고 봉사활동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csv

YCSV 지원


해외에 봉사활동을 가기로 했다. 1년간은 다 잊고 집중할 생각이었다.
당시는 해외봉사활동이 대학생의 하나의 스펙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었다.
덕분에 좋은 프로그램들이 대학생들에게 많이 소개되고 있어서 나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친구의 추천으로 한국 YWCA와 영국의 봉사단체 CSV가 연계해서 진행하는 YCSV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영국에 거주하며 현지 장애인을 caring 프로그램이다.?조건이 좋았다. 체류비가 들지 않고 약간의 pocket money까지 지급되서 비용면에서 매우 매력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지원 과정은 꽤 장벽이 높은 편이었다. 서류는 영어 에세이 제출이고 면접은 한국인 한국어 면접, 한국인 영어 면접, 영국인 영어 면접 총 3차로 진행됐다.

열심히 준비했고 다행히 최종 합격됐다.
떠나기 전 함께 합격한 인원들끼리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비종교인 중에는 나처럼 진지하게 봉사활동을 목적으로 지원한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nipun

클라이언트, Nipun Sharma


합격자 중 가장 먼저 클라이언트가 선정됐고 바로 영국으로 출국했다.
내 클라이언트는 Indian British인 Nipun Sharma(당시 16세). 고기능 자폐를 갖고 있다.

Nipun의 부모는 성공한 인도 이민자였다. 그는 다행히도 유복한 환경에서 특별한 부족함없이 살고 있었다.

그의 결핍은 ‘친구’였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춘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게 문제였다. 영국도 한국과 다르지 않았다. 장애가 있는 친구는 학교에서 놀림감이었다. Nipun의 부모는 그의 친구를 원했다.?그렇다. 나의 미션은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암기와 수학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
=> 2자릿수 X 2자릿수를 계산기 수준으로 답한다.

-기차역과 공항에 가는 것도 매우 좋아하고?기차와 비행기를 타는 것도 매우 좋아한다.
=> 3정거장만에 가는 길도 돌아서 20정거장에 걸쳐 간다.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는 일에 집착한다.
=>웬만한 유명인사의 생일은 모두 외우고 있다.

이 정도가 그가 자폐이기 때문에 갖는 특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ycsv_london

고군분투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Nipun을 만나기 전까지 자폐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출국 전에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고 영화 Rainman을 본 게 전부였다.
그런 내가 그와 함께 지내는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나의 일은 그의 생활에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것이었다. 함께 등교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외출하고 그가 학교와 학원에 가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그와 함께 했다.
처음 몇 개월간은 클라이언트를 바꾸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부모가 원하는 것과 그가 원하는 것 모두 만족시키는 것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
-그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 것을 사실이라고 말해주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자폐이기 때문에 하는 행동과 10대이기 때문에 하는 행동을 구분하는 것
-동일한 내용의 대화가 반복되는 것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대변하는 것

등등 모두 쉽지 않았다.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그녀의 어머니 Sushma는 나에게 정말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줬다. 그녀의 직업은 Social Worker였고 Nipun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의 전문가였다. 게다가 매우 강하고 따뜻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아마 Nipun이 그녀와 같은 어머니를 두지 않았다면 나는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 감사한다.

 

 

nipunandmecsv_gradu

나에게 남은 것, 그들에게 남은 것


나는 일과 생활의 경계 없이 그들과 어울려 살았다. 최선을 다했고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진정성을 갖고 매진하면 그를 좀 더 낫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CSV의 슬로건처럼.

그런데 활동을 마치고 나서 그게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무런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나를 만나기 전의 Nipun과 내가 떠나기 직전의 Nipun은 거의 다르지 않았다.

활동 기간 동안 나는 그에게 service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활동이 종료되고 나서 내가 service한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회복지사는 나에게 맞지 않는 직업이라는 것
-내 세상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하다고 치부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는 것
-다름의 차이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인정할 것
-장애인의 장애 현상을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하지 말 것

-흔히 장애인이 있는 가정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삶도 다른 이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이 있다는 것
-진정성 있는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는다는 것
-영국에 가면 두 팔 벌려 환하게 반겨줄 친구가 생긴 것

영국을 떠나던 마지막 날 Nipun의 집은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Nipun뿐 아니라 그의 동생 Nikhil, Sushma까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Nipun은 울먹이며 언제 다시 올 수 있냐며 몇 번을 되물었다.

요즘에도 가끔 그들과 메신저로 대화한다. 대화할 때 매번 그들은 언제 올 수 있냐고 묻는다. Sushma는 비행기표를 사줄 테니 오라고 한다.
내가 그들에게 service한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특별한 추억을 선물했다는 것

그들 마음속에 내가 따뜻한 추억으로, 따뜻한 사람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게 뿌듯하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