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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양품의 아트디렉터이자 일본디자인센터 대표 하라켄야.
이 시대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림을 좋아하다보니 디자인에 늘 관심을 열어두고 있었다.
가끔 일로 디자인을 접한 덕분인지 디자인이 단순한 미적 표현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것이며 상당한 정신노동이 따르는 업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책은 디자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읽어봤으리라 짐작한다. ?디자이너가 아니라도?”디자인이란 뭘까?” “무인양품의 아트디렉터는 어떤 사람일까?” 라는 가벼운 호기심으로 접근해도 좋을 책이다.?한 분야에서 정점에 닿은 사람이 펴낸 책이라는 점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책은 주로 하라켄야의 디자인 철학과 그의 포트폴리오를 담고 있다. 하라켄야의 인사이트는 내가 예상했던 것을 훨씬 상회했다.
그의 디자인 철학은 개인과 사회, 경제와 환경, 역사와 미래에 대한 심도높은 고민을 바탕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디자인이란 물건을 만들거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생생하게 인식하는 것이며, 뛰어난 인식이나 발견은 생명을 지니고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으로서의 기쁨과 긍지를 갖게 해 준다.”

하라켄야의 디자인에 대한 정의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책안에 담긴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이렇게 쉽게 정의하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내적 정립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몇몇 부분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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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무인양품의 CD 플레이어. 하라켄야의 작품이 아닌 제품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의 작품이다.
워낙 유명한 제품이지만 환풍기에서 착안한 디자인이라는 점은 몰랐다. 전체적인 모양새와 길게 늘어뜨린 줄이 환풍기와 닮았다. 이 제품이 환풍기가 아니라 CD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뇌에 새겨진 환풍기의 기억은 그대로 우리 몸에 작동한다. CD플레이어를 줄을 잡아당겨 작동시키는 순간 바람이 아닌 음악이 들려온다. 촉각의 기억이 청각으로 변화해서 전혀 새로운 경험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이런 디자인의 힘이 과거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CD플레이어를 인기 제품으로 만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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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양품의 광고. 무인양품의 당시 광고 컨셉트는 ‘EMPTINESS’ 즉, 광고가 명확한 메시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 그릇을 내보이는 것처럼 하자는 의미이다. 메시지가 아닌 빈 그릇을 내보이며 오히려 수용자 측이 그것에 의미를 담아냄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게 의도한 것이다. 무인양품의 고객은 ‘도회적이고 세련되서”친환경적이어서”가격이 싸서”그냥’ 등등의 이유로 제품을 소비한다. 광고 메시지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대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광고의 이미지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지평선을 소재로 선택했다.
“지평선이란 아무것도 없는 영상이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다.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모두를 바라다보는 영상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디자이너들은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많은 일본의 전통문화를 서구 문화에 의해 훼손당했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한국에 비해서 일본은 그래도 문화적 정체성이 잘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지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서 놀랐다.

“내가 만약 에도 막부에 근무하는 디자이너였다면 메이지 유신을 눈앞에 두고 할복자살을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하라켄야는 일본적인 디자인에 대한 상당한 고집이 있는 듯 보인다.

가고시마 공한 근처에 있는 여관 ‘가조엔’의 경영자 타지마 타테오는 ‘천공의 숲’ 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타지마는 32헥타르에 달하는 산을 하나 구입했는데 이 산을 정비해서 겨우 5개 정도의 방을 드문드문 지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32헥타르에 겨우 5개의 방이라니. 인공적인 것을 거절하고 자연의 리듬 속에서 시간이 흐르는 장소를 경영하고 싶은 의도라는데…참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 책은 2003년에 지어졌는데 구글링에 잘 나오지 않는 걸로 봐서 프로젝트가 무산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발상 자체는 존경을 금치 않을 수 없다.

“무엇인가를 생략하는 것만으로 만들어지는 상품군은 왠지 풍요로운 느낌이 퇴색되고 어쩔 수 없이 사용자에게도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또 생략이라는 방법은 간단하게 복제된다는 약점도 있다. 무인양품은 제품과 마주 대함으로써 새로운 생활의식이 고무되는 계발성을 가진 제품 생산을 이상으로 삼는다.”

이게 자연주의 매장을 방문했을 때와 무인양품 매장을 방문했 을때 느꼈던 품격의 차이였던거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정의하거나 상세히 적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전혀 모르는 것으로 가정하고, 그 실체에 도전해 보는 것이 대상을 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인식하게 해 준다. 예를 들어, 앞에 컵이 하나 있다고 하자. 당신은 이 컵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컵을 디자인해 주시오.’라고 부탁받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디자인 해야만 하는 대상으로서의 컵이 당신에게 주어지자마자,’어떤 컵을 만들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컵에 대해 잘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더구나 컵에서 접시까지. 미묘한 정도로 조금씩 깊이가 다른 수십 개 이상의 유리그릇 형태가 눈앞에 일렬로 떠오른다…(중략)…이렇게 당신은 컵에 대해 더욱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컵에 대해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이전보다 컵에 대한 인식이 후퇴했다고 할 수는 없다…(중략)…더 ‘현실적인 존재로서의 컵’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디자인은 손재주가 아니라 두뇌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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